바둑책

芸の探究 (예의 탐구)

野 人 2008. 6. 13. 19:50

 

          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             

 

 

              

 

 

             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

 

 

 

 

 

 

芸    の    探    究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불리하지 않은 바둑도 곧잘 던졌으며  상대의 惡手에도 기분이 상하곤 했던 전형적인 浪漫派 .

특히 중반의 收拾과 打開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번뜩였던  변화무쌍한 山部의 바둑은

모든 것이 어려웠다.

 

" 攻擊과 收拾이라면  나는 무조건 收拾에 걸겠다."

" 쫒기지 않으면 두는 맛이 나질 않는다."

그의 語錄과 행동 곳곳에는  狂氣 어린  표현들이 등장한다.

 

무카이 가즈오 門下.  기발한 發想과 破格 ~ !!

1950 年, 호시노와 대국한 바둑은 수순이  무려 411 手에 달하여  最長手数 바둑으로 기록되어 있다.

 

狂人 으로까지 불렸던 天才 ~   타고난 를 滿開하지 못한 채 .. 

가지하라, 후지사와 선생과 함께  戰後派 三羽烏로 기대를 모았으나 ..

" 사카다는 점점 멀어져 간다."  라는  말로  그 아쉬움과 悔恨을 달래며 안타깝게 사라져 간 ..

 

 銀 髮 의  마 술 사        야 마 베   도 지 로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1933 年  入段 .  坊門 출신으로  슈사이 名人의 총애를 받았다.昇段 대회를 통한  日本棋院 최초의  九段 .

 

강한 맷집을 바탕으로  웬만한 펀치는 개의치 않고  거세게 밀어붙였던..  가공할 만한 완력과 강펀치의 소유자.

그의 저돌적인 棋風은  덤프트럭에 비유 될 정도였다.


 

吳淸源과의 十番碁  內傷으로 쓰러진  藤沢庫之助 ~

十番碁에서 막판으로 몰리면서  늘 사직서를 품에 품고 다녔다는  구라노스케 ~


 

吳淸源과의  3 次에 걸친 十番碁 ~

" 내가 왜 졌는지 모르겠다.  나의 패배를 납득키 위해 다시 두려는 것이다."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

日本棋院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 계속해서  吳 九段에게 달려드는  후지사와 구라노스케.

그렇게 멈추기에는 그의 성격이 너무 강했고  또 너무 젊었다.

 

그러나 그는  互先에서 先相先으로..  또다시 定先으로  속절없이 밀리고 만다.

日本棋院은 그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 

아울러 최초의 九段이라는  그 명예와 권위도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.


이에 그는  53 年, 면목이 없다며  日本棋院에 사퇴서를 제출한 후59 年, '호사이(朋齊)' 란  이름으로 복귀하게 된다.

 

그가 十番碁에서 置數가 고쳐지는  마지노선 만이라도 버텨 냈던 들

그렇게 허망하게  승부세계를 떠나는 일은 없었을 것이다.

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다.

 

다카가와 九段과는 정반대로  언제나 어렵고 복잡한 길 만을 고집했던  호사이 ~

사카다 선생은 그를  ' 타고난 바둑꾼 '  이라  표현했다.

 

吳淸源이라는 거대한 산 앞에서..

十番碁에 관한 한  마치 魔神처럼 이겨가는  그의 존재 앞에서 절망하고 자책하며..

또 마냥 작아지며 쓰러져 갈 수 밖에 없었던  또 하나의 天才 ~ 

 

흉내 바둑의  大 家 - 성난 파도       후 지 사 와   호 사 이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드릴 공격  가지하라 ~ !!   야스리 제메  가지하라 ~ !!   部分 感覚  天下一品 ~ !!

 

勝敗와 形勢를 떠나  언제나 最善과 最强만을 고집했던..  求道者.

先生의 이러한 所信과 哲學은  이 걸린 重且大한 한판에서도  변함이 없었고..

이로 인해  안타까운 逆轉敗도  유독 많았다.

 

초대 홍인보, 세키야마 선생  門下로  돌의 형태를 중시했으며  많은 新定石을 만들어 냈다.

'드릴 전법'  -  '겉돌기 전법'  으로  표현되는  독특한 棋風의  梶原流는

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 골수 팬을  만들어 냈다.

 

 

연구회나 해설을 통해  수많은 신조어를 만들어 냈고

또한  ' 森 の 石 松 '  으로  불릴 만큼  毒舌의 大家이기도 했으며..

기다니 道場을 비롯한  젊은 棋士들에게는  엄격한  훈육 師範이었다.

 

바둑의 초반을  학문에 비유할 정도로  長考派였던 그는

또 다른 長考의 大家 - 하시모토 쇼지와의  王座戦 대국에서..

두 棋士는 이틀걸이 바둑의 첫 날, 단 9 手만 진행하는..  長考 전쟁이라는  진풍경을 연출한다.

그러면서  했던 말이  '오늘이 승부처였다'  라고..  ㅎㅎ

 

특유의 毒과 直說로 座中을 휘어잡으며  항상 팬들과 검토실을 즐겁게 했던 ~

쓰기우치, 야마베 선생과 함께  현대바둑  不運의 三天才로 꼽히는..

 

 드 릴  공 격      가 지 하 라  다 께 오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그의 부친 또한 専門棋士인  겐지  5 1941 年에  기다니 門下로 입문.

그의 나이  20 살이 넘어서며 가노우, 가다와 함께  戰後派 新三羽烏로 기대를 모았다.

 

66 年,  巨峰 사카다를 쓰러뜨리며  選手権戰 타이틀을 차지한 후 ~   4 連覇  !!

이후  選手権戰의 사나이로 불리게 된다.

 

둔중한 힘을 바탕으로  선이 굵은 공격력을 보여 줬던  腕力의 소유자.

흡사 헤비급 복서의  육중한 펀치를 연상케 한다.

 

마에다 九段은  그를  ' 해머 펀치 '  라  칭했고..

야마베 九段은  그에게  12 世  本因坊  ' 丈和의 再來 '  라는  찬사를 보냈다.

 

그러나  이러한 棋風과는 정반대로  존경하는 棋士는  슈에이 名人이라고..

' 善 人 原 器 '  로  불릴 만큼  그의 인품은 덕망이 높았다.

 

 

腕 - 해 머  펀 치      오 히 라   슈 조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' 華 麗 '  라는  표현에는 동감할 수 없다.

 

새카만 하수의 눈으로는 감히  '함축적 두터움'  이랄까..  '여백의 두터움' 이랄까...

폭풍전야의 '고요한 두터움'  아니면, 비를 가득 머금은 '먹장구름같은 두터움'  은  어떤가..

사치스러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, 오히려 절제 된 느낌인데..

그래서 '華 麗' 라는  표현은 잘 와 닿지 않는다.

 

아니다.  모두 다 맘에 들지 않는다.

그는 형언할 수 없는  一流의 두터움을 지녔다.

바로  ' 秀 行  一 流 의  두 터 움 '  그것일  뿐이다.

 

本名은  保 (다모쓰),  후쿠다 마사요시  門下.

 

온갖 奇行과 逸脫 ..  스스로를 경솔함과 실수로 점철된 인생이라며  겸손해 했다.

그러나  바둑판 앞에서는  大道無門의 豪放함과  膝錐之志의 峻烈함을  보여 주었다.

 

" 선생의 技藝를 고스란히 훔쳐  後世에 전하는 것이 나의 임무다."

大竹  九段이 했던 말이다.

 

" 나의 技倆으로  사물을 재지 말라."

" 단 한 手 만이라도  後世에 남길 수만 있다면.."

 

괴  물     후 지 사 와   슈 코

 

  

玄玄閣에서 발행한  '日本代表棋士名局選' 의  '藤澤秀行' 편이 바로 이 책을 번역한 것이다.